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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내린 비로 온 천지가 축축한 9월 10일 오전 9시, 제주 신시가지에서 택시를 타고 왕복 4차선으로 시원하게 뻗은 태평로를 따라 40분쯤 달렸을까. 서귀포시 대정읍 구억리에 다다르자 제주영어교육도시 안내판이 시야에 들어왔다. 국내 최초 공립국제학교를 표방하며 지난해 9월 19일 개교한 한국국제학교(KIS) 제주캠퍼스는 영어교육도시 입구에서도 한참 안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대지 면적이 3만9121㎡(1만1835평)에 달하고 사방에 녹음이 우거진 캠퍼스는 도심에선 보기 힘든 이국적인 풍광을 자아냈다. 건축면적 1만1322㎡(3425평)에 연면적이 2만8497㎡(8620평)나 되는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의 건물들은 직육면체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국내 일반 학교와 달리 곡선의 미를 살린 독특한 디자인으로 설계돼 있었다. 또 제주의 전통 민가처럼 마당을 가운데 두고 채광과 조망을 살려 건물을 배치한 덕에 어디서건 볕이 잘 드는 구조다.
건물은 크게 초등학교, 중학교, 다목적시설, 기숙사로 나눠져 있다. 또 친환경 인조잔디를 깐 축구장과 50m 육상트랙, 테니스코트 2곳, 400석 규모의 계단식 대강당, 통유리로 마감한 실내수영장, 실내 체육관, 체력단련실, 스크린골프장, 골프연습장, 록밴드연습실, 오케스트라연습실, 악기연습실 등 다채로운 예체능시설도 갖추고 있다.
자연에서 호연지기, 영어도 술술
기숙사 3개동에는 2인용 학생실 180여 개와 라운지 11곳이 있다. 이곳에 상주하는 여러 명의 내·외국인 사감은 학생의 안전과 다양한 활동을 지원한다. 넓고 청결한 학생식당에서는 끼니마다 신선한 재료로 만든 한식과 양식 외에도 샐러드 바와 후식을 함께 제공한다. 성장기에 필요한 균형 잡힌 영양 섭취를 돕기 위해서다. 다음은 김명기 KIS 제주캠퍼스 총괄이사의 말이다.
“서울이나 대도시에 이런 학교를 짓는 건 엄두도 못 내요. 캠퍼스 규모도 클뿐더러 건물이 반듯반듯한 구조가 아니라서 건축비와 운영 경비 등 제반 비용이 엄청나게 들거든요. 더구나 천혜의 자연환경을 아우른 1만 평 넘는 학교 부지가 어디 흔한가요? 제주 영어교육도시에서나 가능한 일이죠.”
아이들은 교실에 앉아 선생님을 맞지 않고 쉬는 시간을 이용해 자신이 공부할 교실로 이동했다. 음악, 미술, 과학, 수학, 작문 등 각 교실에는 해당 분야의 전문 교사가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이 학교 교복의 일종인 캐주얼한 생활복 차림이었고 누구나 예외 없이 어디서건 영어로 대화를 나눴다. 심지어 초등학교 2학년 여자아이 넷이서 걸 그룹 흉내를 내며 놀 때조차 영어를 썼다. 낯선 방문객에게는 신기하기만 했지만 이 학교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상이다.
크리스틴 제라벡 부교장은 “아이들이 처음에는 영어가 서툴렀는데 지금은 수업은 물론 모든 활동이 영어로 이뤄질 만큼 실력이 향상됐다”며 “학생을 새로 선발할 때는 재학생의 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영어 실력과 인성을 많이 볼 계획”이라고 밝혔다. 악기연습실에 모여 있던, 플루트 삼매경에 빠진 여학생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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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학생이 최소한 악기 하나씩은 다룰 줄 알아요. 방과 후에는 두 시간 동안 예체능 활동을 하거든요. 학생들은 음악, 체육, 미디어, 치어리딩 등 40여 개 활동 가운데 학기당 최소 두 가지씩을 선택해 배울 수 있어요. 체험학습이나 봉사활동에도 적극적이죠.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은 주말마다 스킨스쿠버와 승마도 배워요. 우리 학교에서는 초등학교 과정인 1~5학년과 중학교 과정인 6~8학년 때는 필요한 만큼만 공부시켜요. 대신 체력단련과 창의성·인성 발달, 세계 시민의식 함양을 위한 활동을 더 권장해요. 미국 대학은 고등학교 과정인 9학년 이상의 성적표를 원하기 때문에 9학년부터는 공부 강도가 무척 세지거든요. 그래서 고등학교 과정과 미국 대학생활에 쉽게 적응할 수 있게 대비하는 거죠.”
최고 보딩스쿨 수준 교육
KIS 제주캠퍼스는 해외 체류 경험 없이도 들어갈 수 있고 남녀가 함께 공부하며 초·중·고 과정을 모두 가르치는 주간 기숙학교다. 현재 쓰고 있는 건물은 제주도 교육청이 무상으로 지어주고 YBM시사가 위탁 운영해 내륙의 외국인학교는 물론 같은 영어교육도시 안에 있는 다른 국제학교보다 수업료가 훨씬 저렴하다. 김 이사는 “다른 국제학교는 학비가 연간 4000만 원 넘게 드는 데 반해 우리 학교는 수업료 1800만 원, 기숙사비 1200만 원이면 된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교사와 교육의 질은 미국 최고 사립 보딩스쿨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YBM시사는 KIS 서울캠퍼스(대치동)와 판교캠퍼스(성남)를 10여 년간 운영하며 하버드대를 비롯한 미국 명문대 진학률을 끌어올린 경험과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 서울 성남에 있는 KIS 판교캠퍼스는 2011~12학년도 SAT(미국 대학수능시험) 평균 점수가 2033점(미국 평균 1500점), 미국 대학과목 선이수제(AP·Advanced Placement) 합격률이 92.6%(미국 평균 57.5%)에 달한다. 2010년 졸업생의 경우, 프린스턴대 스탠퍼드대 펜실베이니아대(유펜) 등 미국 대학평가 40위권 이내 대학 합격률이 59%, 세계 대학평가 40위권 이내 대학 합격률이 38%에 달했다. 원래 판교캠퍼스에서 근무하던 김 이사가 이곳으로 자리를 옮긴 것도 판교캠퍼스의 신화를 제주에서 재현하기 위해서다.
김 이사는 제주캠퍼스 개교 1년 전부터 판교캠퍼스에서 데려온 베테랑 직원 10여 명과 함께 성공적인 안착을 위한 기반을 닦았다. 그 덕에 KIS 제주캠퍼스는 개교 1년 동안 재학생 420여 명의 기대에 부응하는 세계적인 수준의 교과목 학습과 다채로운 예체능 수업을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교육과학기술부가 주관한 ‘2011년 우수시설 학교’ 평가에서도 최우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 학교는 미국 유수의 교육공인인증기관 중 하나인 미국서부지역교육평가기관(WASC)에서 인정하는 커리큘럼을 채택해 미국 정규교육과정으로 운영되며 한국 학력 인증에 필요한 국어(필수)와 사회(초등 과정)·역사(중등 과정)를 교육과정에 포함시켜 이수하게 한다. 또 기존의 우수 학생 진학 비법에 미국 정부가 해외 국제학교를 위해 만든 특별교육과정(AERO)을 도입해 작문, 독해, 수학, 논리적·비판적 사고력, 사회성, 체력증진 등의 수업을 소그룹 단위의 실험·실습 위주로 진행한다. 또 고교 과정인 9학년부터는 미국 대학 진학에 유리한 AP 수업을 받도록 하고 있다.
교육 프로그램과 면학 분위기에 대한 학생들의 만족도도 높았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6학년 문정현(12)양은 “일반 학교에 다닐 때는 공부 스트레스가 많았는데 여기서는 마음 편히 즐겁게 생활할 수 있어서 좋다”며 “영어실력도 나날이 늘어 영어로 수업하고 숙제하는 게 전혀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제주시에서 통학한다는 6학년 이성운 군도 “수업 내용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불편함이 없다”며 “활동적인 수업이 많아 학교 다니는 게 재미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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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학교의 또 다른 특징은 집단따돌림 같은 학교폭력 문제가 없다는 것. 제프리 프랫 비디 교장은 “처음부터 모든 아이가 잘 어울린 것은 아니었다”며 “미국 사립학교의 엄격한 규율에 따라 친구를 괴롭히거나 학습 분위기를 해치는 학생에게는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경고, 정학 등의 벌을 줘 교내 분위기를 순화하려고 부단히 애쓴 결과”라고 전했다. 그는 또 “한국 학교에 다니다 국제학교에 들어오면 분위기가 너무 차이 나서 우리 운영진이 교사와 학부모, 교사와 학생 사이에서 완충제 구실을 하고 있다”며 “기존 KIS를 운영하며 얻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학부모, 학생들과 언제든 열린 마음으로 소통해서인지 밝고 진취적인 학풍이 빨리 정착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제주=김지영 기자| k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