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교단에서]짚신에 지게 지고 지리산 종주한 고3

choib 2012. 10. 16. 12:37

[교단에서]짚신에 지게 지고 지리산 종주한 고3

영국의 산악인 머메리는 “등산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정상을 오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싸우고 그것을 극복하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지난주에는 1, 2학년 전체 학생들과 함께 2박3일 동안 지리산 종주를 했습니다. 그야말로 고난 극복의 과정이지요. 저는 성삼재에서 출발하여 천왕봉을 거쳐 중산리로 내려왔습니다. 산 능선 단풍은 절정을 넘어 잎을 지우고 있었습니다. 매년 이맘때마다 다녀오는 연례행사이지만 올해는 그 어느 해보다 순간순간 감탄사를 많이 쏟아낸 감동적인 산행이었습니다.

우선 장엄한 지리산의 단풍에 감탄하고, 또 우리 아이들이 부쩍 성장한 모습에 감탄하고, 무엇보다도 우리 선생님들의 팀워크와 헌신에 감탄했습니다. 행사 끝난 뒤 선생님들이 이구동성으로 “올해는 작년보다 참 좋았다”며 흡족히 웃는 모습을 보고 저도 덩달아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처음엔 3학년도 함께 지리산 종주를 하려 했으나, 전교생 135명과 교사까지 합하면 160여명이 한꺼번에 몰려가는 것은 지리산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요. 그래서 3학년은 같은 기간에 2박3일 동안 6개 조별로 통합기행을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3학년 경환, 태욱, 유리는 올해도 지리산 종주에 동참했습니다. 동기생들과 함께할 편안한 여행 포기하고 후배들과 동고동락한 이 세 친구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든든합니다.

경환이는 1학년 때 일부 구간에서 발가락만 끼우고 신는 조리로 산행을 했습니다. 안전한 산행을 위해서는 상식 밖의 행동이지요. 2학년 때는 더 용감하게도 짚신을 신고 나타났습니다. 태봉고 1기 학생회장인 경환이가 이렇게 엉뚱한 일을 벌이다니요. 저는 그냥 허허 웃기만 했습니다. 평소 생각 깊은 친구이기 때문에 저의 고정관념으로 괜한 잔소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더 놀랍게도 외할아버지께서 사용하시던 철제 지게에다 짚신 여섯 켤레를 매달고 등장했습니다.

“오, 맙소사! 덩치도 작고 키도 자그마한 친구가 저렇게 무겁고 큰 지게를 지고 어떻게 험한 지리산을 오른단 말인가. 그냥 내버려둬도 좋을까요?”

아무래도 험한 바위산을 오르내릴 때 위험하니 좀 말리는 게 어떻겠냐고 여러 선생님들께 의견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벌써 작년부터 벼르던 일이니 안전교육을 시키고 그냥 지켜보자고 했지요. 짚신 신고 무거운 지게짐을 지고 다람쥐처럼 산을 타는 김경환! 저는 3일 내내 경환이의 발걸음을 한 번도 따라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후배나 선생님들보다 먼저 산장에 도착해서 밥을 해 놓고 파전을 부쳐서 이웃 등산객에게까지 돌리는 모습에 탄복했지요. 첫날 연하천 산장에서 은하수 별빛이 쏟아지는 밤에 경환이는 저에게 살짝 다가와 귓속말로 말했습니다.

“쌤, 저 오늘 ○○대학교 수시 1차 합격했다고 연락받았어요.”

“오, 그래! 축하한다. 건축공학과라고 했지? 정말 잘됐구나. 정말 멋있다!”

태욱이도 이번 산행에서 줄곧 경환이와 함께 걸었습니다. 역시 맨발에 짚신 신고 기타까지 짊어지고 산을 올랐지요. 굳이 등산복 차려입을 필요 없다면서 평소 학교에서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산에 오르는 남태욱! 경환이보다 더 작고 깡마른 체구로 그 무거운 짐을 지고 내달리는 저 힘은 도대체 어디서 솟는 것일까요? 태욱이도 지리산 종주 기간에 ○○대학교 철학과의 수시 1차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유리는 제일 힘든 화엄사 코스를 선택했기 때문에 저랑 마주치진 않았습니다. 시내 인문계고등학교를 다니다가 1학년 2학기 때 전학을 왔던 권유리. 그때는 체력이 약해서 남학생들이 배낭을 들어줘야 할 정도로 힘들어 했습니다. 4시간 코스를 7시간에 걷고 다리가 아파서 파스를 8개나 붙였다고 합니다. 그랬던 유리가 3학년이 되어서는 최고 힘들다는 화엄사 코스를 스스로 선택할 정도로 건강하게 성장했습니다. 유리가 1학년 때 썼던 지리산 종주기는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네요.

“일반학교 있으면 의자에 앉아 영어 단어 외우고 원소 기호 외울 시간이지만 난 종주 3일 동안 그보다 더 많은 것을, 더 좋을 것을 배우고 느꼈다. 그 어떤 시간보다 이 3일이 아깝지 않을 소중한 시간이라 여긴다.”

유리도 몇 군데 대학교의 수시에 지원해 놓고 발표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고3 수학능력고사가 코앞인데도 우리 학교 학생들은 이렇게 아름다운 계절을 놓치지 않고 지리산 종주도 하고, 삼삼오오 모여서 신나는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학교는 처음부터 입시 위주 교육은 하지 않고 교육의 본래적 목적에 충실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상식과 고정관념에 도전하며 새로운 학교, 새로운 교육을 꿈꾸고 있습니다.

<여태전 | 창원 태봉고등학교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