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 이야기

논술 교사들 “솔직히 나도 문제 이해하기 어렵다”

choib 2011. 11. 18. 08:29

논술 교사들 “솔직히 나도 문제 이해하기 어렵다”

북적이는 학원 대입 수시 논술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이 지난 11일 저녁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논술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다. | 서성일 기자
ㆍ대입 문제, 현직 교사에게 물었더니

“제가 논술 지도교사지만, 솔직히 지문이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논술 지도는 사실상 방치하고 있는 셈이죠. 제대로 지도할 수 없으니 학생들이 사교육으로 가는 걸 탓할 수도 없어요.”

경향신문은 17일 연세대 수시모집 논술전형 문제(10월 시행)와 고려대 모의논술 문제(5월 시행)를 중심으로 고교 논술 담당 교사 8명에게 문제를 평가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들 교사는 한목소리로 “현재 중상위권 대학의 논술시험은 내용과 형식 면에서 공교육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가 ‘본고사형 논술 금지, 영어지문 금지’ 등의 가이드라인마저 폐지해 대학들이 논술을 본고사화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 논술 지도교사들도 “자신 없다”

올해 연세대 인문계열의 논술은 프랭크 길브레스의 ‘과학적 관리법’과 ‘도락(道樂)’에 대한 동양철학 지문 등을 제시하고 이들을 ‘낭비’의 관점에서 비교하고, 정신활동에 대한 이해방식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라는 문제가 나왔다.

지난 5월 실시한 고려대 모의논술 인문계열 문제는 노인인구 급증에 따른 세대갈등에 대한 지문, 효 사상과 사회적 연대, 복지 예산 등 3가지 지문을 제시한 뒤 ‘제시문 요약’ ‘제시문 사이의 관점 비교’ ‘사회적 문제 해결을 위한 견해 서술’ 등 3가지 문제를 냈다. 세번째 문제는 ‘노령화지수가 (노령화지수)=(노년부양비)2을 만족하고 f(x)는 R에서의 일대일 함수라고 가정하면 (노년부양비-노령화지수) < 1/4이 되는 시점 x가 존재함을 설명하시오’였다.


논술 담당 교사 8명은 한결같이 “문제를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밝혔다. 수도권의 한 외국어고 교사는 “연대, 고대 문제 모두 우수한 외고생들도 정상적인 학교교육만으로는 대비하기 힘들 정도로 어렵다. 지문이 모두 고교 교육과정과 동떨어져 어렵다”고 말했다. 고대부고 수학 담당 오성훈 교사는 “연세대 문제는 다면적 사고를 측정하는 문제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해결방안을 찾기 힘들어 내가 시험을 봤어도 어려웠을 것”이라고 털어놨다.

서울의 한 외고 국어 교사는 “국어 교사도, 사회 교사도 이런 문제들을 제대로 풀 수 없다”면서 “연대 인문계 문제의 경우 인지심리학과 경영학, 철학, 경제학 논리가 모두 들어갔다. 이런 문제를 통합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시스템은 고등학교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연세대 지문 (나)는 테일러리즘에 대한 경영학 이론, (라)는 초기 인식이 나중을 결정한다는 글인데 (나)를 (라)에 적용시키라는 문제는, 인문계열로 진학하는 아이들에게 경영자 마인드를 심는다는 점에서 문제”라고 비판했다.

중앙고 이현주 교사는 “제시문이 고등학생 선정 필독도서 범위를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필독도서가 동서양 고전 200여권으로 너무 많아 그런 노력도 무의미하다”고 지적했다.

교사들은 사회탐구와 과학탐구가 선택과목인 현행 교육과정상 모든 영역을 통합하거나 전 영역에서 문제를 출제하는 것도 학생들의 어려움을 더한다고 평가했다. 고대부고 안은호 교사는 “집중이수제 때문에 배우지 않은 과목도 있고, 학교별로 아예 개설되지 않은 과목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영역을 알아야 풀 수 있는 논술문제는 학교교육으로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학교 차원의 논술지도로 유명한 동북고의 권영부 교사는 “논술이 어려워진다는 것보다 점점 문제풀이식으로 가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권 교사는 “좋은 문제는 아이들의 창의력을 끌어내는 열린 문제”라면서 “2012년 연세대 창의인재트랙의 ‘2040년에 세종대왕이 외계인을 만나면 어떤 대화를 나눌까’ 같은 유형의 문제가 보편화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 어려운 논술, 교육적 효과는 있나

현재의 논술시험은 어렵기만 할 뿐 교육적 의미는 없다는 비판도 커지고 있다. 이병민 서울대 영어교육과 교수는 “현재 대학의 논술시험에는 교육적 논리가 없다”며 “고교 교육과정에 이해가 부족한 교수들이, 자신이 학부나 대학원에서 가르친 과목 중 적당히 뽑아서 출제하는 경향이 강하다. 무엇을 측정하겠다는 것인지도 애매하다”고 비판했다. 이 교수는 “현재의 논술이 학문 후속세대를 뽑기 위한 의미 있는 시험으로 생각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서울대에서 2008년부터 4년째 글쓰기를 강의하고 있는 문학평론가 정여울씨는 현재와 같은 논술고사는 폐해가 많다고 말했다. 정씨는 “요즘 학생들은 대학원 수준 지식까지 알고 있는 상태에서 대학에 들어오는 것 같다”면서 “그러나 글쓰기를 통해 배양되는 사고력과 인문학적 소양은 삶을 통해 숙성되는 것인데, 현재와 같은 교육은 지식을 요약과 압축으로만 편하게 생각하는 경향을 만든다”고 지적했다. 그는 “상당수 대학에서 창의적 생각을 평가하기보다, 정해진 답을 맞히지 못하면 틀리는 식으로 출제해 창의적인 글쓰기나 책읽기에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경향이 있다”고 덧붙였다.

<송현숙·김향미·박은하·정희완 기자 song@kyunghyang.com>

“푸코·들뢰즈… 대학원생도 풀기 힘든 논술”

ㆍ대치동 논술강사 정주현씨

“대학들이 논술고사를 ‘예비 학자’를 뽑는 과정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현재 출제되는 논술고사 문제들은 대학원생 수준의 수학능력을 요구하고 있어요.”

유명 논술강사 정주현씨(39·사진)는 17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정씨는 서울 대치동 학원가에서 ‘빅5’ 안에 드는 창비논술학원의 논술팀장이다. 10년째 대입 논술을 전문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정씨는 “(출제자인) 대학 교수들이 자기가 연구하고 있는 주제를 그대로 출제하다보니 대학·대학원 수준의 지문이 등장한다”면서 “현행 교육 체계와는 한참 괴리된 문제들이어서 공교육에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씨는 “대입 논술은 2002~2003년부터 본고사 성격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대입 본고사는 이른바 ‘3불정책(본고사·고교등급제·기여입학제 금지)’에 의해 허용되지 않고 있지만, 논술이 사실상 이런 구실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현행 대입 논술의 문제점을 고난도의 영어지문, 구체적인 수학 지식이 있어야만 풀 수 있는 수리문항, 지문 자체의 난해함 등 세 가지로 요약했다. 정씨는 “대학 교양영어 수준 이상의 단어가 집중적으로 나오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원문이 어휘 해설 없이 실리거나, 인문계열 수리논술에서 로그함수를 미분하거나 수열을 정확히 이해해야 풀 수 있는 문제가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글지문의 경우에도 사실상 인문계열 대학원생 정도가 읽고 고민하는 푸코의 <말과 사물>,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같은 책에서 지문을 가져온다. 기성 학계에서도 최신으로 취급받는 이론이나 한글 문법에 맞지도 않는 번역투의 복잡한 지문도 버젓이 등장한다”고 전했다. 그래서 “학생들 사이에서 ‘대학들이 채점에 들어가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백지답안을 유도하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돌 정도”라고 했다.

이처럼 난도가 높다보니 일선 교사들이 논술을 가르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했다. 정씨는 “모 사립대는 2009~2010년 논술 문제를 2005~2006년 미국 정치학계 논문에서 가져왔다. 현직 고교 교사들이 어떻게 이런 문제를 풀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러다보니 논술학원으로 학생들이 몰릴 수밖에 없다. 정씨는 “대치동 학원가의 논술강사들은 서울대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고, 그 다음이 고대와 연대 출신이다. 소위 ‘스카이’ 출신만 골라 뽑는다”고 했다. 이어 “논술강사 중에는 서울대 등 명문대 로스쿨 학생과 박사과정 학생들도 많다”며 “지방대 교수들도 대치동에서 논술을 가르치지만 인기가 별로 없다”고 했다. 다른 과목과 달리 수험생들이 오로지 인기 강사만 찾아다니기 때문이다. 대입 수시 논술시험이 한창인 요즘엔 ‘단기 알바’도 채용한다. 서울대 등의 학내게시판을 통해 철학과, 정치학과, 사학과, 국문과 학생을 임시 강사로 뽑아 쓰기도 한다. 그는 “사범대를 나와 고교에 재직해온 교사들은 현재의 논술을 지도할 수 없다”고 말했다.

<글 김재중·사진 서성일 기자 herme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