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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초중고부터 경쟁의 무한궤도 달리다… 지쳐 쓰러지는 20대 //우울증 부르는 사교육 스트레스… 정신과 찾는 학생들

초중고부터 경쟁의 무한궤도 달리다… 지쳐 쓰러지는 20대

[동아일보]
[2020 행복원정대/청년에게 희망을]<2> 탈진한 ‘번 아웃’ 청년들

 

외국어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명문대에 진학한 이모 씨(28·여)는 아직도 대학 문을 나서지 못했다. 그는 “친구 딸(엄친딸)은 말이야”로 시작하는 엄마들의 대화에 자주 등장하던 모범생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고장 난 자동차처럼 도로에서 이탈해 비틀대고 있다.

“중학교 때부터 새벽 2시까지 공부해 외고에 들어갔어요. 뒤처지지 않으려고 더 독하게 공부했죠. 대학만 가면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는데, 공부하는 내용만 달라졌을 뿐 똑같은 경쟁이 또 시작됐어요.”

1등을 놓치지 않았던 그는 대학 입학 후 공부를 놓았다. 결국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아직도 대학생이다. 남미 여행 등으로 탈출구를 찾아봤지만, 돌아온 현실엔 취업이라는 ‘경쟁의 무한궤도’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씨는 “적성에 맞는 일이 뭔지 모르겠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전과(轉科)를 할 것인지, 학교를 그만둘 것인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육상 트랙’에 늘 올라 있는 것처럼 긴장하며 살아가는 건 이 씨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정도와 분야만 달랐지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청년들 대부분이 공감하는 고민이다. 모두가 비슷한 목표를 향해 죽어라 뛰다 보니 어린 시절부터 누적된 경쟁의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일찍부터 ‘번 아웃(BURN OUT·탈진)’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다.

○ 트랙 위를 달리다 탈진한 청춘들

우종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학박사)는 “대한민국의 20대는 ‘탈진 증후군’에 해당할 정도로 일상에서 활력을 잃은 상태”라고 진단했다. 학업이나 일에 쫓겨 성취로 인한 기쁨조차 느끼지 못해 전문가의 상담이 필요한 20대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대학에서 관광학을 전공한 문유진 씨(26·여)는 전공을 살려 여행사에 취직했지만 석 달의 수습 기간이 끝나자 회의감이 밀려 왔다.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았고 흥미가 없는 일을 하다 보니 성과도 나지 않았다. 자신감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1년째 되자 아무것도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무작정 사표를 냈다”고 말했다.

치열한 취업 경쟁을 뚫고 직장에 들어가도 자신이 원하던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자포자기 심정이 되는 청년이 적지 않다. 중고교 시절과 대학 시절 진로에 대한 탐색 없이 직업을 선택한 결과다. 심각한 취업난 속에서도 신입사원의 조기 퇴사가 늘어나는 기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다.

최성구 국립정신건강센터 의료부장은 병원에 찾아온 이런 20대 환자들을 ‘경주마’에 비유했다. 좋은 대학, 사회적 지위가 있는 직업 등 기성세대가 정해 놓은 기준에 맞춰 앞만 보고 달리다가 제풀에 지쳐 쓰러지고 만다는 것이다. 최 부장은 “모두가 같은 답을 갖고 달리니 경쟁이 치열해지고, 원하는 것이 아닌데도 부모 등 주위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하니 스트레스가 극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음주 폭식 잠만이 해결책인 청춘들

위험한 수준에 처해 있지만 청년들은 번 아웃 대처에도 서툴렀다. 동아일보 2020행복원정대 취재팀이 사회여론조사회사 마크로밀 엠브레인과 10대 이상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20대의 26%는 ‘음주, 수면, 폭식 등 본능적 욕구 해결’로 번 아웃을 이겨낸다고 응답했다. ‘그냥 견딘다’는 답변도 19.5%를 차지했다. 최 부장은 “일부 청년은 폭식, 폭주, ‘인형 뽑기 게임’처럼 있는 돈을 다 써버리면서 재미를 찾는 ‘탕진잼’ 등 눈앞에 보이는 쾌락에 열중한다”며 “이는 일종의 우울증 증상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20대의 38%가 번 아웃을 해결하기 위해 ‘여행, 휴학·휴직 등 장기간의 재충전’이 필요하다고 응답했지만 8%만이 행동으로 옮겼다. ‘뒤처질 수 있다’는 불안감에 휴식조차 맘껏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 청년은 학업이나 일을 중도에 포기하고 자신의 적성을 확인해주고 진로를 찾아주는 ‘갭이어’ 프로그램 등에 참여하기도 한다. 한국갭이어 프로그램 참가자는 2013년 991명에서 2016년 4507명으로 3년 사이 약 4.5배로 늘었다. 퇴사를 고민하는 직장인들을 위해 퇴사 원인 분석과 진로 상담을 해주는 ‘퇴사학교’도 생겼다. 지난해 5월 설립된 퇴사학교에 지금까지 3500여 명의 수강생이 다녀갔다.

우 박사는 “번 아웃을 개인의 문제로만 봐선 안 된다”고 말한다. 청년들이 일찍부터 번 아웃 되지 않도록 하려면 교육 제도 개선과 경쟁에 대한 인식 변화 등이 필요하다. 안시준 한국갭이어 대표는 “한국에선 진학이나 취업 직전 학생들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선진국처럼 학생들이 학교 교육을 통해 진로탐색, 진로체험, 진로선택의 과정을 일찍부터 경험하게 해야 ‘조기 번 아웃’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국내에서는 고려대 이화여대 한동대 등에서 한 학기 동안 학생들이 인턴, 봉사활동, 창업 등의 체험을 하면 이를 최대 12학점까지 인정해주는 ‘자유학기제’를 운영하고 있다. 박남주 한동대 교무지원팀 과장은 “교수, 전문가, 기업, 정부 등이 협업을 통해 더욱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직무체험보다 취업을 위한 스펙으로 인식되고 있는 인턴 프로그램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바뀔 필요가 있다. 대학 2, 3학년생을 대상으로 한 조기 인턴 프로그램 등을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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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희 jetti@donga.com·이건혁 기자

 

 

우울증 부르는 사교육 스트레스… 정신과 찾는 학생들

[사교육을 다시 생각한다] [9] 학원중독 학부모, 우울증 앓는 자녀

학원 밀집지역에 학생 환자 많아… 성장한 뒤에 트라우마로 남기도



"의사 선생님, 학원 끊으면 정말로 제 인생도 끝나는 건가요?"

얼마 전 엄마 손을 잡고 소아청소년정신과를 찾은 초등학교 5학년 예은(가명)이가 의사에게 한 질문이다. 엄마는 예은이가 학교에서 이상행동을 보이자, 놀란 마음에 병원을 찾았다고 했다. 상담해보니 선행(先行) 학습으로 이름난 학원에 입학한 것이 계기였다. 그날부터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학원 숙제가 쏟아졌다. 예은이는 시험지를 받으면 눈앞이 하얗게 되면서, 한동안 보이지 않는 증상에 시달렸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어떻게 들어간 학원인데 약한 모습을 보이느냐"고 다그쳤다. 정동선 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는 "사교육 부작용이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정신과를 찾는 아이들"이라면서 "아이가 이상하다고 찾아왔는데, 상담해보면 학부모가 학원 중독 등 (정신 질환이) 심각한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전국의 미성년자 정신과 진료 환자 수는 16만6867명(2015년 기준)이다. 사교육 스트레스로 나타날 수 있는 가장 흔한 증상이 우울증인데, 이 증상으로 치료를 받은 학생은 2만550명이었다. 서울시에서는 미성년자 우울증 환자의 38%가 학원이 밀집한 5개 구(區)에서 진료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 본지가 학원이 밀집한 지역 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 10여 명에게 문의한 결과 "청소년 우울증을 앓는 환자 중 30~60%는 사교육 압박을 받고 있었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지역 한 정신과 전문의는 "연간 400~500명의 미성년자를 상담하는데, 50% 정도는 사교육 스트레스를 호소한다"고 했고, 경기도 분당 소아청소년정신과 개업의도 "우리 병원의 경우 사교육 압박, 사교육으로 인한 가정불화를 말하는 학생들이 전체의 60%가 넘는다"고 전했다.

사교육 받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한림대성심병원 소아청소년정신과 홍현주 교수팀이 경기도 군포 소재 5개 초등학교 1학년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하루 4시간 이하 사교육을 받은 아이는 10% 정도 우울 증상을 보인 반면 4시간 이상이면 우울증에 걸린 사례가 30%를 웃돌았다.

특목고 신입생인 소연(가명)이도 우울증으로 최근 정신과를 찾았다. 소연이는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새벽까지 학원 숙제에 시달렸다. 성적이 생각만큼 나오지 않은 날에는 엄마와 다투다 몸싸움까지 벌였다. 소연이는 병원에서 "쉽게 화가 나고, 한 번 화가 나면 잘 가라앉지 않는다"고 호소했다. 증상이 심각했지만 소연이는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유한익 우리아이 마음클리닉 원장은 "치료보다는 학원이 최우선이라 병원에 두세 번 오다 마는 경우도 부지기수"라면서 "아이가 우울증 등을 겪다 보니 성적이 떨어진 건데, 부모들이 이를 '의지 부족'으로만 보고 닦달하는 것도 문제"라고 했다.

사교육 스트레스가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기도 한다. 직장 부적응, 낮은 자존감, 우울 증상 등으로 정신과를 찾은 30대 김모씨가 그런 사례다. 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 A씨는 "김씨는 과거 축적된 사교육 스트레스가 뒤늦게 '펑'하고 터진 것"이라며 "남들과 비교당하며 유년을 보낸 사람은 자존감이 낮고, 성인이 돼서도 부모와 불화를 겪는 경우가 많다"고 분석했다. 명문대를 나온 김씨는 상담 과정에서 "어릴 때 시험에서 하나만 틀려도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다그쳤던 엄마가 지금도 원망스럽다"고 했다. 김씨는 심리 치료를 6개월 넘도록 받았지만 완전히 사교육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한다.

[김형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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