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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여유

휴대전화부터 끄고 시작합시다”…‘슬로리딩’

“휴대전화부터 끄고 시작합시다”…‘슬로리딩’


■ “어떤 걸 찍어야 할까요?” “어, 글쎄…”

'슬로리딩' 취재를 나가기 전 촬영기자가 물었습니다. 모든 방송취재가 그렇듯 보여줄 수 있는 그림(=영상)이 있어야 뉴스에 힘이 실립니다. 촬영기자가 물었을 때, 취재기자는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슬로리딩' 취재를 나간 날 저는 그 물음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대화가 오갔던 것 같습니다.

- “조용히 책을 읽는 건데… 휴대전화를 끄고…”
= “그냥 휴대전화를 끄는 것만 보여주면 되나요?”
- “아, 아니, 끄긴 끄는데 책을 아주 천천히 읽으실 거에요”
= “조용하고 천천히 읽는 게 슬로리딩 인가요?”
- “어… 그게… 뭔가 음미하면서 책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건데…”

그 날 촬영기자는 슬로리딩 동호 회원들이 '책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을 표현하기 위해 북한강 변에서 갈대도 꺾어보고, 기차도 기다려보고, 물결도 찍어보느라 갖은 애를 썼습니다. 그만큼 빠르고 급박한 사건·사고 위주의 방송뉴스에선 1분 20초 안에 설명하기도 힘들고, 보여주기는 더더욱 힘든 게 '슬로리딩'이었습니다. 시청자분들이 개떡 같은 기사를 찰떡같이 알아봐 주시길 빌 수밖에 없었습니다.

 



■ “생각의 나무에서 열매가 열리길 기다리는 시간”

'슬로리딩' 강연을 한 동화작가 노경실 씨는 어른도 어른이지만 특히 아이들을 위한 독서교육이 한참 잘못됐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많이 읽었느냐에 기준을 두다 보니 이젠 천 권을 읽어도 초등 독서왕엔 명함도 못 내민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때 삼천 권 정도는 읽어 줘야 '아, 책 좀 봤네!'라고 한답니다. 독후감 숙제를 하기 위해, 실적을 채우듯 책을 읽다 보니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에서 정보를 찾듯 '쓸 내용'만 골라가며 읽게 되고 정작 중요한 마음의 양식은 쌓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겁니다.

"책 읽기도 밥 먹는 거랑 똑같아요. 아무리 좋은 반찬 많이 있어도 하루에 열 끼를 먹을 순 없잖아요. 꼭꼭 씹어 먹고 흡수를 해야지 나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고 자랑만 하면 배탈이 나죠."

노경실 작가는 한 권을 읽어도 그 장면을 상상해서 그림도 그려보고, 주인공의 입장에서 혹은 반대 입장에서 가상의 대화도 나눠보는 등 느낌을 충분히 새기는 게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슬로리딩은 기다릴 줄 아는 시간입니다. 처음엔 머릿속에 정보로 책의 내용이 들어오는데, 그 내용이 나만의 생각으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한 줄 한 줄 기다려 줄 수 있는 시간을 담보로 하는 책 읽기가 바로 슬로리딩입니다."

■ 책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 것



1년여 전부터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슬로리딩' 운동이 퍼지고 있습니다. 취미가 '진짜' 독서인 분들은 이미 '슬로리딩'과 관련한 다큐멘터리나 책이 넘쳐난다는 걸 아실 겁니다.

'슬로리딩'의 시작은 스마트 기기와 관련이 깊습니다. 보통 독서를 할 때는 시선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이며 한 줄 한 줄 읽어야 전체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데, 스마트 기기에 익숙해진 요즘 사람들은 책마저도 컴퓨터나 스마트폰처럼 스크롤을 내리듯 상하로 시선을 움직이며 필요한 내용만을 뽑아 읽는다는 겁니다.

'멀티태스킹'이란 이름으로 그럴듯하게 포장됐지만, 책을 읽으며 메일도 확인하고, '꺄톡' 소리에 스마트폰도 봐야 하고… 빨리 읽을지는 몰라도, 제대로 읽는 사람은 드물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 '슬로리딩'입니다.

■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다?

그런데 말입니다. '휴대전화를 끄고, 천천히 음미하며 읽는 것' 말고는 할 게 없는, 참 단순한 독서법인 '슬로리딩'은 요즘 세상에 매우 하기 힘든 것이 돼 버렸습니다. 뜻있는 사람끼리 모여서 함께 휴대전화를 끄지 않고서는 말이죠.

퇴근하고서도 '안부 묻기'를 빙자한 상사의 업무지시가 이어집니다. 달력의 빨간 날과 검은 날의 구분 따윈 상관없는, 아침잠도 없으신 부장님이 그저 심심해서 휴일에 단체 채팅방에 툭 던진 '핵노잼' 농담에도 일제히 일어나 이모티콘을 날려줘야 합니다. 그깟 책이 뭐라고, 방해받지 않고 책 좀 보겠다며 휴대전화를 끄는 순간 나의 자리도 꺼질지 모릅니다.



아직 상사가 없는 학생들은 다를까요? 한 줄 한 줄 음미를 하려면 적어도 상상력을 두드리는 문학이거나 생각이 가지를 뻗을 수 있는 인문학을 읽어야 하는데 학생들은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입시전쟁, 학자금 대출, 취업전쟁...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아실 겁니다.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니라, 알지만 차마 할 수 없는 게 '슬로리딩'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굳이 책이 아니어도 오늘 하루 행복했는지 짧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게 대한민국 99%의 팍팍한 일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다하다 '시간'에도 빈곤이란 말이 붙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그 날 우리가 찍은 것은 '슬로리딩' 하는 자의 여유가 아니라, '슬로리딩' 할 수 없는 대다수의 씁쓸함인지도 모릅니다.

'생각'은 '생각할 시간'을 담보로 합니다. 단지 사람과 동물의 차이, 사람과 로봇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만 '생각'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존재론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아, 대통령님이 강조하는 '창조경제'를 위해서라도 무엇보다 필요한 게 생각(=생각할 시간) 아닐까요? '창조경제' 활성화를 위해 전 국민이 편하게 생각할 시간, '슬로리딩'을 국정화해보는 건 어떨까, 감히 엉뚱한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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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주기자 (mint@k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