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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여유

집값 상승, 중대형 붐 이끈 50대 … 이젠 서울 떠난다

집값 상승, 중대형 붐 이끈 50대 … 이젠 서울 떠난다

경기도 일산에 살다 충남 태안군 남면으로 주거지를 옮긴 김창영(75)·권영희(73)씨 부부가 9일 오후 집 앞마당에서 정원을 관리하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서울 강남구 방배동에 살던 한모(57)씨는 퇴직 2년 만인 지난해 초 경기도 용인시 성복동으로 이사했다. 방배동 아파트(84㎡, 이하 전용면적)를 9억5000만원에 팔아 성복동 같은 크기 아파트를 4억5000만원에 샀다. 차액은 주택담보대출(3억원)을 갚고 아들 결혼비용(1억원)으로 썼다. 남은 1억원은 노후자금으로 남겨뒀다. 한씨가 이사를 결심한 건 생활비 때문이었다. 고정수입도 없는데 매달 100만원의 대출이자를 감당하기 버거웠다. 번잡한 도심 생활도 싫증이 났다. 한씨는 “서울~용인 고속도로를 이용하면 아들 집이 있는 서울 양재동까지 30분도 걸리지 않는다”며 “광교산이 있어 등산도 실컷 할 수 있는 데다 물가가 싸 생활비도 절반으로 줄었다”고 만족해했다.

 반퇴 시대엔 한씨처럼 주거비용을 줄이기 위해 ‘탈 서울’ ‘탈 도심’을 선택하는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전망이다. 고정수입이 없거나 줄어든 상황에서 집값·생활비가 비싼 도심 생활을 유지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퇴직 후 탈 서울이 선택 아닌 필수가 된다는 얘기다. 우리은행 부동산연구실 홍석민 실장은 “정년 퇴직 후 평균 30년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생활비(주거비용)는 줄이고 쾌적성은 높일 수 있는 도심 외곽으로 나가려는 수요가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국토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설문에서도 만 55세 이상 서울 거주자 71.9%는 “현재 주택을 처분해 다른 주택으로 이주하고, 남은 자산 일부를 생활비에 쓸 계획”이라고 답했다.

 주택시장이 오랜 침체를 겪으면서 집값 상승 기대감이 사라진 것도 탈 서울 추세를 부채질하고 있다. 지난 5년간 서울 집값은 4.19% 떨어졌다(KB국민은행 기준). 주택산업연구원 김태섭 연구위원은 “과거엔 퇴직하고 집을 오래 깔고 앉아 있을수록 시세차익이 늘어나고 이를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었지만 앞으론 집값이 오르기는커녕 되레 감가상각을 걱정해야 하는 시대가 되기 때문에 집을 오래 보유할 유인이 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추세는 이른바 ‘386세대’의 선두주자인 1960년생이 만 60세로 법정 정년이 되는 2020년 무렵부터 본격화할 공산이 크다. 내년 정년 60세 연장을 앞두고 직장에서 밀려난 조기 퇴직자와 정년 퇴직자가 한꺼번에 몰리기 때문이다.

 


 이는 국내 부동산시장에도 또 한 차례 지각변동을 몰고 올 전망이다. 386세대가 사회생활을 시작해 경제력을 갖추기 시작한 80년대 후반 주택 수요가 급증하면서 부동산투기 바람이 불었다. 2000년대 이들이 큰 집으로 ‘갈아타기’에 나서자 강남 중대형(전용면적 85㎡ 초과) 아파트 값이 폭등했다. 앞으로 30년 동안 이 세대가 퇴직 쓰나미에 휩쓸리면 다시 한번 부동산시장에 지각 변동이 올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서울과 지방의 주택가격도 재편될 전망이다.

 이 같은 50대의 탈 서울 러시는 서울 집값을 떨어뜨려 반퇴 시대 퇴직자에게 이중 부담을 지울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종전까지는 주택 크기를 줄이는 ‘다운사이징’(downsizing)으로 노후설계 자금을 어느 정도 충당할 수 있었다. 2008년 금융위기 이전만 해도 중대형(전용면적 85㎡ 초과) 아파트 인기가 높아 중소형(전용 85㎡ 이하)으로 갈아타면 차액이 컸다. 당시 이 돈을 은행 예금에 넣어두면 연 6~7%의 이자는 받을 수 있었다. 평균 수명도 지금보다 짧았다. 그러나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중대형과 중소형 아파트 매매가격 차이가 크게 줄었다.

 실제로 서울 잠실동 갤러리아팰리스 아파트 전용 137㎡형에서 같은 아파트 84㎡형으로 옮기면 2008년 1월엔 6억8000만원이 남았지만 지금은 3억7000만원밖에 안 남는다. 게다가 은행 정기예금 금리도 연 2%대로 주저앉았다. 이 때문에 집만 줄여선 반퇴자금을 마련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결국 집을 줄이면서 집값이 더 싼 수도권이나 아예 지방으로 이주하는 대안도 검토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명지대 부동산대학원 권대중 교수는 “386세대의 탈 서울 러시는 서울에 집중된 주택수요를 분산시키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특별취재팀=김동호·김기찬 선임기자
박진석·박현영·염지현·최현주·황의영·박유미·김은정 기자 hope.bantoi@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