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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행복한 책읽기

헌책은 기억한다, 사랑·정의에 파닥이던 내 젊은 날

헌책은 기억한다, 사랑·정의에 파닥이던 내 젊은 날


어느 시대건 청춘은 책에 이런저런 글귀를 남기곤 했습니다. 헌책에 남겨진 글귀들은 우리를 청춘의 때로 데려갑니다. 손 글씨를 눌러 쓰며 삶과 사랑을 고민하던 수많은 청춘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청춘리포트팀은 그런 궁금증을 품고 서울 시내 헌책방 20곳을 돌아다녔습니다. 헌책에 남겨진 글귀의 결은 시대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손 글씨로 또박또박 적어 내려간 고민의 순수함은 어느 시대건 마찬가지였습니다. 청춘리포트팀이 헌책에서 발견한 청춘의 흔적을 소개합니다.

1989년 어느 봄날 “빛 바랜 사랑, 생명보다 귀한가”


『고독한 영혼』 헤르만 헤세: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1877~1962)는 청춘에게 통과의례와도 같았다. 헤세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청춘의 혼돈과 방황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 이 책에 짧은 글귀를 남긴 누군가도 혼돈의 시기를 견디고 있었던 모양이다. 20대 청춘이었을 그는 1989년 3월에 이런 글귀를 남겼다. ‘빛 바랜 사랑. 생명보다 귀한 사랑인가, 사랑보다 귀한 것이 생명인가’. 아마도 그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괴로운 날을 견디고 있었던 것이리라. 청춘에게 사랑은 어쩌면 생명보다도 다급한 일이다. 사랑하고 이별하며 그렇게 우리의 청춘이 흘렀다.

▶문지연(45·중앙대 연극과 89학번·문화체육관광부 문화기술 PD)

“헤세는 부드러우면서도 통찰력이 뛰어나 감수성이 예민한 친구들이 좋아했다.”


1992년 학생운동을 위해 군대를 안 가기로 결심하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베르톨트 브레히트: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브레히트의 책은 금지됐다. 1989년까지만 해도 그랬다. 이 책은 독일 작가 브레히트의 시 47편을 묶은 것이다. 냉전시대가 막을 내리자 해금됐던 지식인들의 작품이 청춘의 삶 속으로 스며들었다. 1992년 8월 29일. 한 대학생은 이 책에 의미심장한 글귀를 남겼다. ‘존재와 의식 간의 갈등을 풀기 위한 보조도구로서의 이 책이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한다. 3학년 1학기 때 군대 가지 않으려고 마음먹은 날 밤.’ 90년대 초반 대학가에서 입대는 학생운동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학생운동의 가치를 끝내 지키려고 했던 이 글귀의 주인공은 어떤 모습으로 청춘의 시기를 통과했을까.

▶김성중(44·서울대 신문학과 90학번. 서울대 대학원 언론정보학 박사 과정)

“브레히트의 시는 부조리로 가득 찬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게 했다.” 


1996년 ‘단순한 공대생’ 마음 어지럽힌 삶과 죽음


『축제』 이청준:청춘의 때에 우리는 죽음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고민하게 된다. 소설가 이청준(1939~2008)의 ‘축제’는 팔순 노모의 장례를 치르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1996년 6월 ‘덕호’라는 이름의 공대생이 이 책에 남긴 메모가 사뭇 비장하다. 이 책으로 대신하여 나의 생각이 조용해지기를….” 그의 마음을 소란하게 했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축제’라는 작품을 집어든 걸 보면 그 생각의 끝에는 죽음의 문제가 닿아 있지 않았을까. 우리가 하루를 산다는 건 하루만큼 죽는다는 뜻이다. 청춘의 시절이 저물면 그만큼 죽음의 시간에 한 걸음 더 가까이 서게 된다. 흘러간 청춘이 서러운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조진희(37·전남대 신문방송 96학번, 스피치 강사)

“이청준은 정직할 수 있는 용기, 진실 앞에 당당할 수 있는 힘을 보여준 소설가다.”


1999년 레닌 책 읽고서 “비겁한 세상, 비겁한 나”


『레닌저작선』 블라디미르 레닌:1991년에 나온 책을 99년 4월 읽었다. 러시아 혁명을 주도한 레닌은 사회주의를 꿈꾸던 70~80년대 청춘들의 마음에 불을 지른 이름이었다. 하지만 냉전이 종식된 90년대 이후 그 이름을 찾는 청춘은 드물었다. 20세기가 저물던 세기말의 어느 날, 대학생 서민정씨는 어떤 계기로 레닌의 저작을 읽게 된 걸까. 아마도 그는 기울어가는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청춘의 미래를 고민하고 있었으리라. 조금은 과격하지만 새로운 세계를 모색하기 위해 이 책을 읽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비겁한 세상. 비겁한 나’라는 글귀에서 청춘의 때 묻지 않은 고민이 읽힌다.

▶이범준(42·서울대 신문학과 91학번, 서울대 대학원 연구원)

“레닌의 저작은 치열한 삶을 말해줬다. 부끄러움을 자주 떠오르게 하는 책이었다.”


2001년 여름 “더위를 느끼며 살아있음을 느낀다”


『외뿔』 이외수:이 책은 소설가 이외수가 쓴 우화다. 납자루처럼 힘이 센 물고기에게 시달리며 호수 바닥을 기어다니는 하찮은 물벌레 이야기가 책의 중심을 이룬다. 청춘의 때에 우리는 종종 스스로가 하찮은 존재처럼 여겨지곤 한다. 현실은 막막하고 미래는 불투명한 청춘에게 어른들의 세상이란 무시무시한 납자루 떼처럼 느껴지기도 하겠다. 이 책에 글귀를 남긴 주인공도 마치 거대한 물고기 떼에게 공격을 받은 물벌레와 같은 처지에 내몰렸던 모양이다. 무슨 까닭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죽을 뻔하다가 기적같이 살아났다”고 적었다. 2001년 7월 10일은 무척 더웠던 모양이다. 글귀의 주인공은 더위를 느끼면서 살아 있음을 감각한다. 어른이 된다는 건 세상의 무자비함에 무감각해지는 일이다. 그것이 두려움과 공포일지라도 느낄 수 있다는 건 살아 있다는 증거다. 느끼니까 청춘이다.

▶김진아(32·한국외국어대 영어과 01학번·감정평가사)

“이외수는 사랑과 삶을 고민하던 청춘의 때에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사고를 하도록 안내해준 작가다.”


2003년 수줍은 여대생 쪽지, 그 풋풋한 이야기의 끝은 …


『천국과 지옥의 결혼』 윌리엄 블레이크:요즘은 보기 드문 일이 됐지만, 책의 속지는 청춘들이 마음을 주고 받는 통로였다. 여기 ‘화정’이라는 이름의 여대생이 ‘성일 오빠’에게 건네는 마음의 이야기가 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통해 넌지시 마음을 전하는 청춘의 풍경이 풋풋하다. 2003년 8월 7일. 화정씨는 성일 오빠에게 ‘순수의 전조(Auguries of Innocence)’를 특히 인상 깊게 읽었다며 책을 통해 말을 건다. 책 82쪽에 실린 ‘순수의 전조’에는 하늘색 형광펜으로 별을 두 개 그려 두기도 했다.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한 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 시집 속지에 적힌 수줍은 말들을 보며 ‘순수의 전조’를 ‘사랑의 전조’로 슬쩍 바꿔 읽어 본다. 블레이크의 시로 이야기를 나누던 화정씨와 성일 오빠는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박희연(30·여·연세대 영문과 03학번·외국계 컨설팅 회사 근무)

“블레이크는 지친 하루 속에서 순수함을 떠올리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글=정강현 청춘리포트팀장, 사진=채승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