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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그런 과목도 있어? 기형적 ‘교과 쪼개기’에 현기증

그런 과목도 있어? 기형적 ‘교과 쪼개기’에 현기증


[H 커버스토리]
고교 과목 수 무려 86개나 외국 학교의 7, 8배 수준

전공 영역별 지분 다툼 탓… 융합교육 추세에 역주행

서울 반포동 한국교과서연구재단에 1950년대와 현재 고교에서 가르치는 사회교과 교과서들이 나란히 전시돼 있다. 55년 1차 교육과정 개정 때 5개이던 사회관련 교과서는 21개로 쪼개져 있다. 왕태석기자 kingwang@hk.co.kr

648만 명의 초ㆍ중ㆍ고교 학생들이 보는 스테디셀러. 바로 교과서다. 천재교육의 초등학교 3,4학년 영어교과서는 연 30만부씩 팔려 대박을 치고 있다. 그런 교과서가 모두 542종, 산술적으로 학년 당 45개를 넘는다. 21세기 세계화, 정보화 시대에 맞는 창조적이고 자율적인 한국인을 육성하자는 뜻으로 과목수를 세분한 결과다. 주요 외국 중ㆍ고교의 교과목이 10여 개에 불과한 것에 비하면, 우리 학생들은 그 서너 배를 골라 배울 수 있어야 맞다. 하지만 교육과정이 수능에 종속된 지금 여건에서 학생이 배우고 싶은 과목을 선택한다는 건 현실성이 한참은 떨어지는 얘기다.

교육의 수능 종속화가 아니라도 해당 교사가 없어서, 또 교실이 없어서 학생이 과목을 선택하기 어렵다. “사회 선택과목이 11개나 되다 보니 한 반 30명 중 대여섯 데리고 수업한다고 보면 돼요. 나머지는 다른 책을 보거나 딴짓을 합니다.” 하지만, 한 고교 1년 교사의 이런 탄식 뒤에는 또 다른 곤혹스런 사실이 숨어 있다. 현실과 동떨어진 교과목 증설, 세분화에 얽힌 이해관계가 그리 간단치 않은 것이다. 교육적 고려보다는 해당 교과 이해당사자 간 ‘야합’으로 과목이 결정되는 경우가 다반사로 목격된다. 김진우 좋은교사운동 공동대표는 “한 교과 안에서 과목을 나누거나, 한 과목 안에서도 단원을 나눌 때 각자 지분을 보호하기 위해 교과서 쪽수까지 똑같게 한다”고 전했다. 어느 과목은 “폭탄주 마시고 쪼개기에 합의했다”거나, 과목 증설에 실패한 교수들이 “밥도 같이 안 먹는다”는 얘기가 공공연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김영석 경상대 교수는 “교과서에 전공 영역이 많이 다뤄져야 임용하는 해당 교사 수가 많아져 대학의 학과가 유지되고, 또 어려운 내용을 가르쳐야 해당 전공교수를 뽑는다”고 교육계 현실을 말했다. 그렇다 보니 과목 간 경쟁이 치열하고 교과내용은 많아져 결국 과목 쪼개기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교육계의 화두인 융합교육도 쪼개진 과목을 지키려는 전공 이기주의 벽을 넘기는 힘들다.

지난달 국가교육과정 개정연구위원회가 발표한 2015 개정안에 따르면 1995년 62개에서 86개로 늘어난 고교 과목수는 다시 101개로 늘어나게 된다. 교육과정이 바뀌면 증설과목 뿐 아니라 다른 교과서들까지 새로 써져야 한다. 그런 때문인지 또다시 교과목 쪼개기와 교과내용 영역을 놓고 지분싸움이 벌써 진행되고 있다. 이번에는 사회과목에 비해 과목 쪼개기에 능하지 못해 교사 숫자까지 역전됐던 과학 전공 분야에서 움직임이 활발하다.

교과서를 둘러싼 이해 문제는 참고서 시장, 교과서 집필진까지 가세, 풀기 어려운 고등 수학에 가깝다. 집필진은 사범대학 교수와 현장교사 5~15명으로 꾸려지는데 대학교수들은 너도나도 집필자가 되려 한다. 전공서적을 써봤자 1,000권 팔리면 대단한 성공인데 교과서는 쓰기만 하면 몇 만권이 나간다. 연간 1조원이 넘는 교과서ㆍ참고서 시장의 경제학도 무시할 수 없다. 교과서마다 차이는 있지만 통상 5만부가 손익분기점이다. 교과서 저자들은 발행부수에 따라 몇 십 만원부터 많게는 1,000만~2,000만원까지 인세를 받는다. 금성출판사 관계자는 “교과서 개발비가 권당 2억~15억원인 데, 요즘은 채택 경쟁이 치열해 적자가 더 많을 것”이라고 했다. 교과서 외에 자습서와 문제집, 수능교재, 학원교재, 전과 등 참고서 시장이 따라 열린다. 자습서 판매는 일선 학교에서의 교과서 채택률과 비례하는데 교과서가 1만부 나가면 1,500~2,000권이 팔린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지난해 처음 실시한 출판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출판사업체 매출 규모는 4조2,470억원이고 이 가운데 교과서 및 학습참고서가 9,526억원을 차지했다.

권영은기자 you@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