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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커닝 페이퍼' 사라진 교실, 웃을 일만은 아니다 =중간고사가 치러지는 고등학교 교실 풍경

'커닝 페이퍼' 사라진 교실, 웃을 일만은 아니다

[아이들은 나의 스승 25] 중간고사가 치러지는 고등학교 교실 풍경

14.10.18 09:19l최종 업데이트 14.10.18 09:19l서부원(ernesto)

지금 학교는 2학기 중간고사를 치르는 중이다. 교실에 들어서니, 시체 마냥 책상 위에 엎드려 있는 아이들이 많이 눈에 띈다. 시험 시작도 전에 잠에 곯아 떨어져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번엔 영어 독해와 작문 시험인데, 순간 그들을 깨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된다. 어차피 다들 '찍고 잘 텐데', 한 시간 동안 잠이라도 푹 자라고 답안지를 대신 작성해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 교실만 그런 건 아니다. 다들 어려워 하는 수학의 경우에는 시험 시작과 동시에 절반 가까이가 '쓰러지고', 최근 들어서는 과목에 상관없이 '찍고 자는' 아이들이 한 해가 다르게 늘어나고 있다. 지난 1학기 기말고사 때에는 문제는 25문항이었는데 OMR 답안지에 33번까지 마킹한 아이도 있었다. 애초 시험지의 문항 수조차 확인하지 않은 것이다.

한 해가 다르게 늘어나는 '찍고 자는' 아이들

지금 학교는 2학기 중간고사를 치르는 중이다. 교실에 들어서니, 시체 마냥 책상 위에 엎드려 있는 아이들이 많이 눈에 띈다.
ⓒ freeimages

학기 당 두 번, 사나흘간의 시험기간을 방학만큼이나 좋아하는 아이들이 참 많다. 스스로 학기 중 두 번의 '짧은 방학'이라고 말할 정도다. 시험기간 중에는 야간자율학습과 보충수업은커녕 점심도 먹기 전에 하교를 하니 그럴 수밖에. 대개 하교 후 오후 시간에 다음 날 치를 과목을 벼락치기로 공부할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그들은 곧장 PC방으로 향한다.

전날 오후에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교문을 나서며 나누는 이야기를 살짝 엿들었다. 시험은 잘 봤는지, 몇 개나 틀렸는지 서로 궁금할 법도 하건만, 마치 금기라도 되는 듯 시험에 관한 대화는 일절 없었다. 대신 여기저기서 '게임 한 판 뜨자'며, '늦게 가면 자리 없다'고 총총걸음으로 교문을 나섰다. PC방은 의외로 아이들 시험기간이 대목인 셈이다.

시험 시작종이 울렸고, 아이들은 부스스한 얼굴로 눈을 떴다.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시험지와 답안지를 받자마자 마치 기계처럼 자기 이름을 적고 학년, 반, 번호 마킹을 끝낸 후 다시 엎드려 버렸다. 정답은 모두 '3번'으로 통일됐다. 수학만큼은 아니어도 영어 역시 아이들에게 어려운 시험인 모양이다. 순간 교실은 단 두 종류의 아이들로 확연히 갈렸다. '눈 뜬 자'와 '눈 감은 자.'

시험 감독관을 하면서 요즘처럼 심심하고 데면데면할 때도 없었던 것 같다. 시험에 별 관심이 없는 아이들이 수두룩해 눈 둘 데가 몇 곳 안 되기 때문이다. 차라리 엎드려 잠든 아이들이 부정행위라도 시도했으면 싶을 때가 있다. 소맷자락에 '커닝 페이퍼'를 감춰 두거나 아니면 책상 위에라도 적어놓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노력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그들은 시험을 잘 봐야겠다는 의욕 자체가 없다. 그야말로 무기력하다. 그저 그럭저럭 시간 때우는 게 목표다. 아무렇게나 찍고 나서 눈 뜬 채로 시험지 여백에 낙서라도 했으면 좋겠다. 그조차도 귀찮아 한 나머지, 나름 찾아낸 가장 '효율적인' 시간 때우기 방법이 바로 책상에 엎드려 자는 것이다.

종료 3분 전을 알리는 예비종이 울렸다. 이에 놀란 듯 다행히 하나둘씩 깨어나 앉아서 기지개를 켠다. 다들 허리가 아프다며 옅은 신음소리를 냈다. 왜 안 그럴까. 1교시부터 내리 세 시간을 삐딱한 자세로 엎드려 잤으니 말이다. 어쨌든 오늘 시험은 마쳤지만, 이들에겐 똑같은 내일이 기다리고 있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 그들은 이 시간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마침 종이 울리고 답안지를 거두었다. 한눈에 봐도 그냥 찍은 것이 수두룩하고, 그 중 몇몇에는 침이 잔뜩 묻어 있다. 그런 답안지를 건네는 아이나 받는 교사나 서로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처음부터 저런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릴 적엔 나름 학교생활 열심히 하고, 공부도 잘 해보려고 무진 애를 썼을 것이다.

그들은 언제부터 학교를 '여관' 삼았을까

대학수학능력시험 9월 모의평가가 치러진 3일 오전 서울 풍문여고 3학년 학생들이 시험 답안지를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

교사로서 그들을 이해해 보기로 했다. 내 스스로 교실에서 그들과 만나는 것이 불편하지 않으려면 마음 속으로나마 그들의 편이 돼주는 게 낫다는 생각에서다. 사실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그와 같은 아이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문제아'였고, '폭탄 돌리기' 마냥 우리 학교, 우리 반만 되지 말라고 기도했던 '꼴통'이었을 뿐이다.

그들이 좋아하는 과목은 '당연히' 없다. 말끝마다 학교에 가는 것 자체가 싫다는 아이들이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다행이라면 일 주일에 한 시간뿐인 체육이나 음악, 미술 시간만큼은 잠을 자지 않는다는 점이다. 수학이나 영어는 물론, 과학과 사회 과목조차도 수업 내용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으니 잘 수밖에 없다는 거다. 숫제 누구는 자고 싶어서 자냐는 투다.

수업시간 내내 그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루 이틀도 아니고 3년 동안의 수업시간 내내 가만히 앉아 '멍 때려야' 하는 건 말처럼 쉽지 않다. 어쩌면 그들이 책상 위에 엎드려 자는 건 그 고통을 줄이는 나름 최선의 선택인지도 모른다. '사고치지 말고 고등학교 졸업장만 따라'는 교사와 부모의 간청에 못 이겨 일찌감치 공부를 포기한 채 그들은 그렇게 고등학교 3년을 버틸 각오다.

그들은 언제부터 학교를 '여관' 삼았을까. 놀랍게도 그들은 중학교 시절 이미 '학교에서 내어놓은' 아이들이었다고 선선히 말했다. 큰 사고를 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공부에 전혀 흥미가 없어 수업시간 엎드려 자기 일쑤였다고 한다. 학교에 와서 운동장에서 뛰어 노는 것 외에는 재미있는 일이 없었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문제아'가 되었다는 거다.

공부를 못하니 안 하게 되고, 안 하니 더 곤두박질치는 악순환이다. 그들은 중학교 내내 또래 다른 아이들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고 낙오한 채로 장장 3년을 보내야만 했던 셈이다. 고작 기초 단계라는 초등학교 과정조차 중학교 3년 동안 따라잡지 못한 채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그들은 더 깊은 무지와 고통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그들에게 고등학교란 중학교 때 학교생활의 연장일 뿐이었다. 장소만 바뀐 채 자고 있으니.

중학교 내에서 그와 같은 학생들을 위한 별도의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고 운영할 수는 없었을까. 그 말이 뜬 구름 잡는 이야기로 들렸던지, 동료교사는 '될 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 본다'며 말을 잘랐다. 교육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만큼 효과가 나오지 않으니 교사들도 쉬이 지치고, 더군다나 상위권 학생들에게 관심이 집중되는 분위기에서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낙오자'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

인정하긴 싫지만,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낙오자'는 결정되어 있다고 말하는 초등학교 교사도 많다. 얼마 전 아파트 같은 라인에 사는 20년 차 초등학교 교사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공부 할 아이'와 '놀 아이'가 이미 확연히 갈려있는 것 같다면서, 1학년 때 말썽꾸러기는 6학년이 되어서도 예외 없이 사고뭉치가 되어 속을 썩인다며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맞장구치듯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 녀석도 한마디 했다. 수업시간마다 엎드려 자는 친구가 있는데, 같은 반이 된 3학년 때부터 줄곧 그랬다고.

그렇다면 이제 유치원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하나. 아니면 어릴 적부터 줄곧 학교를 여관 삼아온 아이들은 애초 '유전'인가. 언젠가 대학에서는 새내기들의 수학능력이 떨어진다며 고등학교 교육을 문제 삼았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게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그런 식이라면, 고등학교는 중학교를 탓하고, 중학교는 다시 초등학교를 탓할 수밖에 없잖은가.

그저 남 탓할 요량이 아니라면, 초, 중, 고 어디가 문제인가를 따져 묻는 건 쓸데없는 짓이다. 대신 우리 교육을 관통하는 공통적인 '적폐'를 찾아야 한다. 각각 초, 중, 고에서 매일 잠에 취한 아이들을 만나는 교사들이 토로하고 공감하는 이야기만 들어보아도 어렵지 않게 '답'을 찾을 수 있다.

나를 포함해 각각 초, 중, 고에 근무하는 세 명의 교사가 만났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이웃이기도 하다. 성적조차 해가 갈수록 양극화되는 현실에 공감하며, 더 늦기 전에 대안이 나와야 한다고 서로 입을 모았다. 공교육 붕괴를 넘어 '학교 무용론'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있다면서. 근무하고 있는 학교는 서로 달라도 그들의 진단은 한결같았다.

초등학교 교사 : "획일적이고 '수준 높은' 교육과정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아이들이 공부에 잠깐이라도 한 눈을 팔면 따라가기 어렵게 돼 있거든요. 그걸 학교 단위의 수준별 수업으로 해결하려다 보니 되레 낙인 효과만 나는 등 부작용이 만만치 않아요. 적어도 학습에 있어 '패자부활전'을 용납하지 않는 구조 속에서 일찌감치 공부를 포기하는 아이들은 지속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어요."

중학교 교사 : "학교 교육이 상위권 아이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봐요. 대학의 학벌구조는 이미 우리 사회의 '상수'가 돼 버렸고, 요즘엔 전국적으로 중고등학교 서열화가 기승이잖아요. '한 사람의 엘리트가 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이야기가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고 가장 잘 구현되는 곳이 바로 학교예요."

고등학교 교사 : "근래 들어 최고의 인재들이 교사가 된다지만, 예전에 비해 학교의 교육력은 되레 퇴보하고 있는 것 같아요. 교실마다 수업시간에 엎드려 자는 아이들이 한둘 아니지만, 많은 교사들이 자신의 능력 밖이라 생각해요. 어찌 손 써볼 수 없다는 거죠. 거칠게 말해서, 학교는 그들의 학습 능력 향상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도, 의지도 없어요. 한마디로, 학교 전체가 무기력에 빠진 거죠. '될 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 본다'는 이야기도 결국 교사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해 끌어온 것일지도 몰라요."

OMR 답안지를 수합하고 보니, 교실 내 37명의 아이들 중 9명의 답안지가 3번과 4번으로 '통일'돼 있다. 넷 중 하나이니 아직은 소수다. 그래선지 학교 교육에서 배제됐고, 언제부턴가 그들은 '투명인간' 취급을 받고 있다. 그래도 옆 교실 보다는 사정이 나은 모양이다. 그 반에서는 절반 가까이가 그렇단다. '이게 어디 어제 오늘의 일이냐'며 동료교사는 애써 덤덤해 한다.

공부를 포기한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건 오로지 참고 버티는 '깡'뿐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교문을 나서는 그들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인다. 내일도 시험이지만, 그들은 어김없이 PC방으로 달려갈 것이다. 그리고 두 달 뒤의 '짧은 방학' 기말고사를 손꼽아 기다릴 것이다. 자문해 본다. 저들에게 대체 학교 교육이란 무슨 의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