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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졸속적인 교육과정 개편, 누굴 위한 것인가 / 통합교육해도 대학이 문·이과 나눠 뽑으면 '말짱 도루묵'

졸속적인 교육과정 개편, 누굴 위한 것인가

[오마이뉴스 정은균 기자]

2009년 9월 11일, 미국 코넬대 '경제학' 박사 출신인 이주호 교과부 차관이 2009년 개정교육과정을 원안대로 추진하겠다고 '긴급' 발표했다. 애초 이명박 정부의 공약으로 발표된 '미래형교육과정'이라는 이름이 붙은 교육과정이었다. 핵심내용은 이 차관이 낸 책 <평준화를 넘어 다양화로>에 나와 있었다고 한다.

미래형 교육과정 개편을 위해 그해 2월 27일 1차 토론회를 시작으로 7월 24일까지 모두 네 차례의 토론회가 열렸다. 긴급 발표가 있은 지 18일 뒤에 1차 공청회가 열렸다. 정식 고시는 그해 12월 23일이었다. 경제학 박사 출신 교과부 차관이라는 한 '개인'의 책에서 태동한 교육과정이 불과 1년여만에 세상에 나온 것이다.

당시 미래형 교육과정은 역량중심·학년군제·절대평가제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특별히 내 눈길을 끈 것은 역량 중심 교육과정이었다. 역량에 초점을 맞춘 교육과정은 서구 선진국이 1990년대 후반 이후부터 중점을 두어왔던 내용이다. 교육을 통해 미래 핵심 역량을 키우자는, 1997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주창한 '데세코(Definition and Selection of Key Competences)' 프로젝트가 대표적인 예다.

뒤늦게 교육과정에 '역량' 들고 나온 정부, 그러나...

우리 정부는 그들보다 10여 년 늦게 '역량'을 들고 나왔다. 뒤늦은 감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사회적 상호작용'이나 '자율적 행동'과 같은 핵심 역량을 학교교육과정에 도입해 키워보자는 아이디어는 참신하게 다가왔다. 국·영·수를 중심으로 한 입시 교육이 지배하고 있는 학교 현장에 아주 조금은 숨통이 트일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미래형 교육과정의 핵심으로 보였던 역량 중심 교육과정은 흐지부지되었다. 대신 과목별 수업시수 20퍼센트 증감을 통한 학교교육과정 다양화니 학생 학습부담을 줄이기 위한 집중이수제니 하는 구체적인 제도들만 부각되었다. 많은 이가 반대했으나 이들은 2011 개정교육과정에 그대로 이어진다.

역량 중심 교육과정으로 '미래형' 인재를 기를 수 있겠다는 일말의 기대감은 걱정으로 바뀌었다. 각 학교 현장에서 학교교육과정 다양화와 집중이수제를 '악용'하여 국·영·수를 중심으로 한 입시 교육을 좀 더 보란 듯이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때 한 걱정은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나만의 주관적인 속단이 아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은 지난 7월 11일부터 7월 23일까지 전문산하기구인 <참교육연구소>와 <참교육실>을 통해 전국 1005명의 중등 교사들을 대상으로 국가수준교육과정 개정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2014년 9월까지 총론의 주요 내용을 결정하고 2015년 8월 총론과 각론을 고시할 계획인 상황에서 국가수준교육과정에 대한 의견을 모아 정책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따르면 과목별 수업시수증감이 교육과정 다양화에 기여했는지를 묻는 질문에 90퍼센트 가까운 교사가 부정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같은 질문 문항에서 주관식으로 기타 의견을 낸 교사들 대다수는 과목별 수업시수 20퍼센트 증감이 국영수 증가만 가져왔을 뿐 교육과정 다양화에는 거의 기여하지 못했다고 답변했다.

집중이수제가 학습부담을 줄였는지를 묻는 질문에도 거의 100퍼센트에 가까운 교사들이 부정적이라고 보았다. '전혀 그렇지 않다'가 79퍼센트, '그렇지 않다'가 18퍼센트로 나왔다.

집중이수제는 1년 동안 나눠 배워야 하는 내용을 한 학기에 집중적으로 이수하게 함으로써 학생들의 부담을 줄여주고 교과 내용을 깊게 배우게 하자는 취지로 도입된 제도다. 하지만 전체 학습 내용과 학습 시간이 줄지 않는 상황에서 학생들의 학습 부담이 줄어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집중이수제는 결국 학생들의 학습 부담은 거의 줄여주지 못한 채 학교가 교육과정을 편성하는 데 큰 곤란을 겪게 하는 등의 부작용만 만들어냈다. 집중이수 시간을 활용해 토론?실험 중심의 프로젝트 수업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식의 청사진은 그야말로 청사진으로만 그치고 말았다.

교육과정 개정, '교육은 백년지대계' 강력히 적용돼야 하는 사안

국가수준교육과정은 우리나라 전체 초·중·고등학교 교육의 방향타 구실을 한다. 준법정문서로서의 위상에 걸맞게 학교 현장에 미치는 영향력 또한 크다. 교육과정 개정 작업에서는 기존 교육과정의 결과나 효과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 사전 충분한 의견 수렴을 통한 철저한 준비와 검토 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교육과정 개정은 그야말로 '교육은 백년지대계'라는 말이 가장 강력하게 적용되어야 하는 사안이다. 긴 호흡으로 차분하게 추진해야 하는 이유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웬 일인지 갈 길이 무척 바쁜 듯하다. 교육부는 지난 2월 업무보고를 통해 교육과정 개정을 예고하면서 밝힌 개정 로드맵상의 일정을 착착 진행하고 있다. 애초 예정되었던 대로 지난 11일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 개정안 총론의 주요 사항을 발표했다. 이 날은 공교롭게도 5년 전 교과부 차관이 미래형 교육과정에 관한 '긴급 발표'를 한 날과 같은 날짜였다.

정부는 교육과정 개정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나 정작 학교 현장에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교사들이 별로 없다. 상기한 전교조 설문조사에서 국가수준교육과정 개정 사실을 알고 있다고 답한 교사는 100명 중 15명 정도에 불과했다. 나머지 85명은 교육과정 개정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대답했다.

교육과정을 개정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현장 교사들과의 소통이나 이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등의 절차를 거치는 일이 무척 중요하다. 새로 마련되는 교육과정에 따라 실제 수업을 설계하고 실시하는 주체가 교사들이기 때문이다.

기존 교육과정의 성과와 한계, 문제점을 가장 '전문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이들도 교사들이다. 이들의 목소리가 많이 나올수록 좀 더 현장 친화적인 교육과정이 만들어질 수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교육과정을 통해 기존 교육과정에서보다 더 많은 교육 성과를 얻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정부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다. 나라 전체의 교육과정을 개정하는데, 이를 아는 교사가 거의 없다는 게 그 단적인 증거다. 이는 교육과정 개정이 정부와 일부 학자들에 의해 폐쇄적이고 일방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의 방증이기도 할 것이다.

앞서 언급한 미래형 교육과정은 2007년 개정된 7차 교육과정이 채 적용되기도 전에 개편 작업이 시작되었다. 보통 2~3년이 걸린다는 개편 작업도 미래형 교육과정에서는 토론회까지를 포함해 채 1년이 걸리지 않았다. 현장 의견을 수렴하면서 기존 교육과정을 차분하게 분석할 여유는 전혀 없었다. 한 '개인'의 아이디어를 확장하고 집대성했다는 점도 곱게 보이지 않았다.

전철 밟고 있는 정부의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 개편 작업

이번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 개편 작업도 이와 비슷한 전철을 밟으려 하고 있다. 총론 개발과 연구가 이루어진 9개월간(2014년 1월~9월) 공청회는 지난 12일 딱 한 번 이루어졌다. 그 공청회 안내도 하루 전에야 나왔다고 한다. 전교조가 현장 의견이 배제된 밀실 개정절차의 반복이라며 강한 비판 성명을 낸 배경이다.

이번 교육과정 총론 세부지침과 각론 결정 및 고시는 내년 9월로 예정되어 있다. 개편 일정이 총 1년 9개월로 잡혀 있으니 미래형 교육과정보다는 길다. 그렇다고 교육부가 그 사이에 현장 의견을 적극적으로 청취하고 기존 교육과정을 냉철하게 평가하는 등의 작업을 충실히 수행할지는 의문이다. 개편 작업 기간이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문·이과 통합형'이, 어떤 과정과 절차 속에서 이번 교육과정 개정의 핵심 키워드가 되었는지 궁금하다. 졸속적이고 전격적으로 진행되는 개정 작업을 지켜보건대, 현장 물정 모르는 일부 학자나 이론가들이 아이디어 수준에서 낸 것이 전면적으로 부각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어서다. 같은 맥락에서 이번 교육과정 개정이 관련 연구자나 업무 담당자들에게 구체적인 성과 내기를 강요하는 시스템에 따라 이루어지는 게 아니기를 바란다.

교육부가 진정으로 미래지향적인 교육과정을 얻고 싶다면 일정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백 번 양보해 촉박한 일정에도 최선의 교육과정을 도출했다고 해 보자. 대다수 일선 교사 모르게 추진된 교육과정 개편이 현장에 제대로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 수면 위로 떠오른 이번 교육과정 개편이 현장 의견을 좀 더 꼼꼼히 챙겨 듣고, 기존 교육과정에 대한 평가를 철저히 한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길 진심으로 고대한다.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싣습니다.

 

 

 


교육부 통합교과 개정안 논란
교과서만 합친 융합과학 실패 전례, 고민 없이 바뀌는 교육과정 불신도

교육부가 2018년부터 적용키로 한 ‘문ㆍ이과 통합형 교육과정 개정안’에 대한 논쟁이 본격화했다. 융합인재를 키우겠다는 취지는 좋지만 교육과정에 절대적 영향을 미칠 대입제도에 대한 방침은 미뤄놓은데다, 도입이 4년도 남지 않아 일선 학교의 역량ㆍ준비 미비로 ‘빚 좋은 개살구’에 그칠 수 있다는 지적이다. 12일 충북 청주 교원대에서 열린 ‘문ㆍ이과 통합형 교육과정 총론 공청회’에서 참석자들은 “의견 수렴 없는 성급한 개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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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ㆍ대입제도 언급 없어 혼선

1963년 제2차 교육과정 이후 50년 넘게 계속된 고교 문ㆍ이과 칸막이를 없앨 열쇠는 대학에게 있다. 현재 초등학교 6학년이 고1이 되는 2018년부터 문ㆍ이과 통합교육을 한다고 해도 이들이 수능을 보는 2021학년도 입시에서 대학이 계열에 따라 선택과목에 가중치를 두는 식으로 사실상 문ㆍ이과를 갈라 신입생을 선발하면 사실상 통합 교육과정이 제대로 운영되기 힘들다. 전문가들은 대학이 면접 등으로 인문ㆍ자연계 학과에 맞는 인재를 추려낼 수 있는 만큼 “대입제도 개선이 문ㆍ이과 융합 교육의 핵심”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교육부는 개정안을 발표하면서 대입제도 개편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문ㆍ이과 모두 국어ㆍ영어ㆍ수학ㆍ통합사회ㆍ통합과학ㆍ한국사 등 6개 과목을 수능 출제과목으로 하겠다고 했을 뿐 심화과정인 선택과목을 어떻게 반영할지는 논의된 게 없다. 대입 3년 예고제에 따라 2017년 말에 발표한다는 계획이다.

비상에듀 이치호 입시전략연구실장은 “공통과목으로만 수능을 치른다면 학력 저하를 우려한 대학이 심층 면접을 강화할 수 있고, 선택과목까지 볼 경우 학과에 맞는 선택과목을 이수한 수험생에게 가산점을 주는 식으로 대응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이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문ㆍ이과 통합교육은 허울에 그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늘교육 임성호 대표는 “개정안에 문ㆍ이과 구분의 근본 원인인 수능과 대입제도에 대한 내용이 없어 학교ㆍ학부모ㆍ학생들의 혼란만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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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역량강화 없이 부실 우려

문?이과 구분 없이 모든 학생들이 통합과학, 통합사회를 배우도록 한 것은 이번 개정안의 주요 내용이나 이전에도 실패로 끝난 적이 있다. 2011년부터 고교 1학년이 배우는 융합과학 교과서는 물리ㆍ화학ㆍ생명과학ㆍ지구과학을 모두 담았지만 정작 학교에서는 교사들이 전공에 따라 떼어 가르치는 ‘융합 없는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 서울 마포구 한 고교 교사는 “생명과학을 전공한 교사가 전문성이 떨어지는 물리ㆍ화학ㆍ지구과학까지 가르치려고 하니 수업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교사들의 준비 없이 과목만 통합했을 때 오히려 부실 수업을 초래할 수 있다는 단적인 예다. 하지만 남은 4년 안에 교과서 개발부터 교사 배치, 교습과정 개발이 준비되기는 빠듯하다.

학교를 사랑하는 학부모모임 최미숙 대표는 “가정교과에서 소프트웨어 교육을 하기로 했지만 전문성이 결여된 기술ㆍ가정교사가 수업을 맡을 경우 학습 효과가 현저히 떨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좋은교사운동본부 김진우 공동대표는 “교사들의 역량강화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또 다시 융합과학의 실패를 반복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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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마다 바뀌는 교육과정 피로감 커

의견수렴 없이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바뀌는 교육과정에 대한 불신도 상당하다. 이날 공청회에 참석한 한 중학교 교사는 “정부가 바뀔 때마다 교육과정을 뒤흔들어놓지만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게 우리 교육의 현 주소”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남기 광주교대 교수는 “상설 국가교육과정위원회(가칭)를 만들어 정권 교체와 상관없이 장기적으로 교육과정을 개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히려 학습량이 늘어나 사교육 시장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임성호 대표는 “모든 과목을 공부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학원들을 많이 찾게 될 것”이라며 “벌써부터 전과목 종합반 학원이 잘 되지 않겠냐는 문의가 들어오고 있다”고 말했다.

한양대 교육학과 정진곤 교수는 “왜 문ㆍ이과 통합을 해야 하는지, 융합형 인재는 어떻게 길러낼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핵심인데, 정부는 그런 고민 없이 과학, 사회 이수단위를 얼마로 할 것인지에만 초점을 두고 있다”고 비판했다.

변태섭기자 libertas@hk.co.kr

청주=정지용기자 cdragon25@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