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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놀면서 다양한 경험…내가 원하는 걸 찾는 법 배웠죠”

“놀면서 다양한 경험…내가 원하는 걸 찾는 법 배웠죠”


 

채은씨가 최근 <서머힐에서 진짜 세상을 배우다>라는 책을 냈다. 스스로를 한국인도 영국인도 아닌 ‘서머힐리언’이라고 부르는 그가 해냄출판사 책장 앞에서 자세를 취했다.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한겨레] [함께하는 교육] 영국 대안학교 서머힐의 교육법

영국의 대안학교인 서머힐을 졸업한 채은씨가 지난 14일 한국의 대안학교인 이우학교를 방문했다. 그는 학교 구성원들과 만나 “서머힐에서 배운 건 내가 원하는 걸 스스로 찾아가는 방법”이라며 “아이들 본인이 성취감을 느끼고 좇는 일을 인정해주라”고 말했다.


“서머힐은 저에게 고향이나 다름없어요. 부모님과 더불어 저의 기본적인 소프트웨어를 깔아줬다고나 할까요? 서머힐의 가장 큰 장점은 공부하거나 놀 수 있는 자유를 주면서 저를 기다려주고 존중해주는 거예요.”

1999년 9살에 오빠, 남동생과 영국 서머힐에 입학해 9년간 다녔던 채은(24)씨. 서머힐은 영국의 교육자 알렉산더 닐이 1921년에 설립한 학교다. 학생들의 행복에 가치를 두고 자유로운 교육과정으로 운영돼 전세계 대안학교의 롤모델이 되고 있다.

서머힐 졸업 뒤 현재 런던 연극대학교인 센트럴 스쿨 오브 스피치 앤 드라마에 다니는 채은씨가 한국을 찾았다. 스스로를 한국인도 아닌 영국인도 아닌 ‘서머힐리언’이라고 말하는 그가 서머힐에서 겪은 생생한 이야기를 담은 책 <서머힐에서 진짜 세상을 배우다>를 최근 출간했다. 서머힐을 졸업한 한국인이 쓴 최초의 책이다. 채은씨는 정신과 의사인 정혜신 박사와 이명수 심리기획자의 딸이기도 하다. 채은씨는 성씨를 사용하지 않는다.

놀면서 배우는 게 가능해?

그는 지난 14일 오후 6시에 대안학교로 유명한 경기도 성남 이우학교 학생들과 만남을 가졌다. 이날 이우학교 대강당에는 학생·교사·학부모 등 60여명이 모였다. 지금까지 텔레비전이나 언론에 서머힐의 모습이 소개된 적은 있지만 졸업한 학생을 직접 만날 기회가 많지 않은 탓에 참석자들의 관심은 컸다.

서머힐은 널리 알려진 대로 ‘놀이’를 강조하는 학교다. 채은씨는 “처음에는 나도 수업에 잘 안 들어가고 많이 놀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놀았던 게 그냥 놀았던 것만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여러분, 아주 심심하다고 느낀 적 있나요? 오랫동안 심심하면 괴로워요. 나무도 자주 올라타면 지루하거든요. 심심한 건 내가 뭔가 하고 싶은 일이나 관심거리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전 심심함에서 벗어나려고 <오렌지 필>이라는 교내 잡지에 글도 써보고 친구에게 배운 피아노도 치고 이런저런 수업에도 그냥 들어가 봤어요. 심심한 덕분에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제가 좋아하는 게 뭔지 알게 됐죠.”

서머힐이 놀이 위주로 돌아가긴 하지만 마냥 놀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진학이나 진로에 필요한 공부는 본인의 몫이다. 시간표도 본인이 필요한 과목 위주로 짜고, 수업을 들어가는 것도 자기 마음이다. 일주일에 정해진 수업시수는 없고, 교사와 상담해 너무 많으면 빼는 등 알아서 정한다. 대신 필요한 부분에 대해 교사에게 도움을 청하면 개설된 과목이 있든 없든 따로 수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학생 수가 적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채은씨도 프랑스 유학을 준비할 당시 프랑스어 교사와 단둘이 공부했다. 또 목공이나 연극도 교사와 일대일 수업을 했다. 현재 서머힐에는 한국 학생 6명을 포함해 68명이 다니고 있다. 당시 채은씨도 패션과 뮤지컬을 배우고 싶어서 한 교사를 찾아가 도움을 받았다.

“12살에 의류업을 하는 이모의 해외 출장을 따라갔다 패션에 관심이 생겼어요. 아는 게 없어서 클래스 담임인 레너드 선생님을 찾아갔죠. 수염도 덥수룩하고 패션과 거리가 먼 그였지만 무작정 가서 패션을 알려달라고 했어요. 그는 인터넷서점에서 패션 관련 서적을 주문해서 보고 과제도 내주며 함께 공부했어요. 나중에는 제가 혼자 <보그> 패션잡지도 주문해 보고 책도 찾아보며 알게 됐어요.”

뮤지컬도 교내에서 어슬렁거리다 우연히 발견한 <오페라의 유령> 시디 덕분에 관심이 갔다. 그는 교사에게 가서 그 뮤지컬을 보고 싶다고 했다. 교사는 관심 있는 아이들을 모아서 런던에 공연을 보러 가자고 했다. 그는 공연을 직접 보고 온 이후에도 채은씨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추천해줬다.

서머힐 아이들은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일단 찾아보고 모르면 교사한테 물어본다. 교사는 그 아이에게 맞춤형 수업을 열어주고 본인도 모르는 경우에는 관련 서적이나 자료를 찾으며 함께 공부한다. 그러다 보면 학생이 자연스레 그 분야에 빠져서 다음 단계로 혼자 배워나가게 된다. 본인이 관심 있는 분야를 발전시키면서 교사와 학생 모두 성장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공동체 생활은 관계 맺기의 핵심

서머힐은 만 12살 이하만 입학할 수 있다. 어릴 때 와야 서머힐의 방식에 적응을 잘한다고 생각해서다. 보통 5살부터 15살의 학생이 다닌다. 기숙하는 학생들은 연령에 따라 다른 건물에 나뉘어 지낸다. 물론 근처에서 통학을 하는 학생도 있다.

“아까 누군가 서머힐 하면 떠오르는 걸 ‘자치’라고 했는데 일주일에 두 번 ‘미팅’이 있어요. 학교와 교사가 다 같이 모여서 규칙을 만들고 이를 어겼을 경우 어떤 벌칙을 줄 것인지 정하는 시간이죠.”

‘자유의 상징’인 서머힐에는 무려 200개의 크고 작은 규칙이 있다. 빨래 내놓는 날부터 남의 방에 들어갈 수 있는 시간, 시내에 나갈 수 있는 연령대나 선배와의 동행의무 등 대부분 생활하는 데 필요한 것들이다. 사람들은 불편한 점이나 건의사항을 미팅 때 얘기하고 모두의 의견을 다 들은 뒤 다수결로 결정한다.

“남들과 함께 살면 사소한 것에서 불거지는 문제가 많아요. 빨래하는 날짜를 정하거나 야밤에 누가 깨우거나 남의 물건을 허락 없이 쓰는 등 서로 알면서도 고쳐지지 않는 일이 생기면 미팅 때 이야기해요. 지금 생각하면 별거 아니지만 당시에는 본인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다들 참여해서 의견을 내요.”

서머힐 9년 과정 마친 채은씨

성남 이우학교 학생들과 만나

수업도 놀이도 스스로 선택

채은씨가 지난 14일 경기도 성남에 위치한 이우학교에서 학생과 학부모, 교사를 대상으로 서머힐의 교육과정이나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최화진 기자

진학에 필요한 공부는 본인몫

공동체 생활방식 몸에 배도록

빨래하는 날 등 규칙만 200여개

교사와 함께 벌칙 수준도 정해

운동회 외엔 학부모 활동 없어


평소에는 교내에 ‘옴부즈맨 제도’를 만들어 운영한다. 당사자들끼리 해결하기 힘든 일상 속 문제를 그때그때 해결하기 위해 만들었다. 주로 고학년을 대상으로 옴부즈맨을 뽑고 문제가 생기면 옴부즈맨에게 찾아가 이야기를 한다. 그럼 그가 양쪽의 의견을 들어서 조정을 한다. 만약 거기서 해결이 안 되면 미팅 때 가져가서 전체의 의견을 묻는다.

채은씨의 강연이 끝나고 학생 한명이 질문을 했다.

“서머힐에도 왕따나 학교폭력이 있나요? 만일 그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결하나요?”

사실 그가 쓴 책에도 나왔지만 채은씨는 친구를 직접 왕따시켜서 미팅 때 안건이 올라간 적이 있다. 그는 “왕따 문제가 가끔 있긴 한데, 그런 문제가 일어나면 학교 전체가 난리가 나고 분위기가 싸해진다”며 “하지만 긴급미팅이 열리고 모든 사람들이 자기 일처럼 주시하고 관심을 가지기 때문에 왕따가 드러난 뒤 보통 3주 이상은 안 간다”고 했다.

“한국인들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어요. 저랑 언니들이랑 어울려서 다른 애를 한국말로 속닥거리며 괴롭히고 따돌렸어요. 피해자가 옴부즈맨을 찾아가고 미팅에 논의가 되면서 문제가 커졌죠. 사실 왕따 당한 애가 나쁜데 저한테만 뭐라고 하니까 억울했어요. 벌칙을 받아도 잘못한 게 없다고 일부러 센 척했어요.”

그런 그가 바뀐 것은 언니 오빠들의 역할이 컸다.

“서머힐에서 가장 무서운 벌칙인 ‘정학’ 얘기가 나오니까 저희들의 행동이 바로 고쳐졌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사실 법이 무섭다기보다 내가 가족같이 생각하는 사람들, 평소 내가 옳다고 따르는 언니 오빠들이 잘못됐다고 계속 비판을 하니까 생각을 다시 하면서 행동이 바뀌게 된 거 같아요.”

학부모와 거리두기, 한계는 있다

한국의 대안학교는 대부분 학부모 파워가 세다. 입학 전 면담부터 학교 운영이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서머힐은 이 때문에 학부모와 적당히 거리를 두려고 한다. 여름 방학 때 운동회 비슷하게 여는 이벤트를 제외하고 따로 이뤄지는 학부모 활동도 없다. 그럼에도 부모와 갈등을 겪는 학생이 있다.

“모든 이에게 서머힐이 맞는 건 아니에요. 본인이 체계적이고 짜인 생활을 원해서 서머힐을 떠나는 친구들도 있어요. 하지만 부모의 생각이 서머힐과 추구하는 바가 달라서 혼란스러워하는 아이들도 적지 않아요. 부모님이 서머힐에 보내면서 너의 선택대로 해라, 마음껏 놀라고 해놓고 집에 가거나 통화할 때 수업은 좀 들어가냐고 물어보면 불편해서 마음 놓고 자유를 누리지 못해요. 음악을 전공하고 싶어 했던 친구는 부모의 강요에 못 이겨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기도 했죠. 하지만 공부하는 내내 괴로워하다 1학년을 마치고 그만두고 부모를 설득해 결국 지금은 음악을 전공하고 있어요.”

채은씨의 책에 보면 서머힐의 교육이나 시설이 불충분하다고 여겨 부모가 그만두게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나온다. 또 그의 일본인 친구는 서머힐이 너무 자유분방하게, 아무 체계 없이 가르친다는 것이 불만이었다. 실제 채은씨가 다녔을 당시 본인이 원해서 서머힐을 떠난 친구도 있었다. 그는 “서머힐 초반에 고등학교에 가려면 시험을 봐야 하는데 내가 충분히 공부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아무도 공부를 다그치지 않으니 오히려 불안했다”고 털어놨다. 서머힐을 졸업한 이후의 삶은 평범하다. 채은씨와 학교를 다녔던 친구들은 대부분 대학생이다. 서머힐을 졸업하고 대학에서 수학이나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거나 영화를 전공해 예술고등학교에서 영화 제작을 가르치고 있다.

“학교는 교육과정을 대개 학생에게 전달해줘야 할 지식의 꾸러미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교육과정을 성장의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학생의 존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가 중요하죠.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서머힐은 우리보다 훨씬 더 경험을 통한 성장을 강조해요. 우리도 학교 운영을 좀 더 유연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이수광 이우학교 교장)

우리의 교육환경에서 보면 서머힐은 그저 먼 나라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채은씨가 한국의 학생과 학부모, 교사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마음껏 놀고 내가 듣고 싶은 수업만 듣고 하고 싶은 일을 찾아 하면서 배우고 얻는 게 확실한데… 사실 서머힐을 다닐 때는 몰랐어요. 졸업하고 그게 뭐였을까 하는 생각에 이 책을 쓰게 됐어요. 쭉 정리하다 보니 제가 서머힐에서 배운 건 내가 원하는 걸 스스로 찾아가는 방법이었어요. 저마다 하고 싶은 게 다른데, 정해진 길을 강요하지 말고 아이들 본인이 성취감을 느끼고 좇는 일을 인정해주는 거요.”

최화진 기자 lotus57@hanedu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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